효당 최범술[2007년 11월 09일]









차를 대중화하는 데 효당 최범술만큼 공헌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 다도계의 정설이다. ‘한국의 차문화’ 저자 운학 스님도 “효당의 다통(茶統·차살림)을 일본식이라고 평하는 경향이 있지만, 설사 그의 다통에 그런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오늘 우리가 차를 이만큼 인식할 수 있게 된 데에는 그의 공로가 절대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연기조사, 의상대사, 도선국사 등 다승들이 머물렀던 경남 사천의 다솔사. 차가 아니더라도 정겨운 절 이름이 주는 매력 때문에 꼭 가고 싶었는데, 막상 절에 당도하고 보니 듣던 대로 다사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법당 뒤로 부챗살처럼 펼쳐진 차 밭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차 밭에 그늘을 드리우는 편백나무 숲도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효당만큼 이력이 다양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승려이자, 3·1운동 때는 영남지방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했고 훗날 비밀결사인 만당을 조직한 독립운동가, 제헌국회의원으로 활동한 정치가, 국민대학을 창설한 교육자, 다도인 등등이다.

1904년에 다솔사 앞마을에서 태어난 효당은 곤양보통학교를 졸업한 다음 해인 16년에 다솔사로 출가한다. 그는 승려 신분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다이쇼대학에서 불교학을 공부하고, 국내로 돌아와서는 박렬의 일본천황 암살 계획을 돕고자 상하이로 건너가 폭탄을 운반한다. 이 때문에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는데, 단재 신채호의 유고를 간행해 또 한 차례 고초를 겪는다. 그 뒤 만해 한용운의 제자가 되었으며 해방 뒤에는 해인사 주지를 지내는 등 다양한 경력과 일화를 남기면서 60년 그의 나이 56세를 분기점으로 하여 79년 입적 때까지 다솔사 조실로 주석하면서 자신의 여생을 차로 회향한다.

독립운동하다 8개월간 옥고 치르기도

그의 다도는 엄격했으며 차 맛은 짜기로 유명했다. ‘짜다’는 말은 다인들의 은어로 차의 맛이 진하다는 뜻. 나그네가 극락암 선원장 명정스님에게서 들은 얘기다.

“탕관에서 물을 푸기 전에 선방에서 입정(入定)하듯 차 도구로 탁탁탁 치더군요. 무릎을 꿇고 찻잔을 돌리는데 찻잔에서 손을 뗄 때는 손으로 원상(圓相)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내가 ‘바쁜데 뭐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했더니 ‘이 사람아, 바쁘기는 뭐가 바빠. 공연히 바쁠 것이 없는데 자기가 만들어서 바쁜 것이지’ 하고 핀잔을 주더군요. 또 효당의 차는 매우 짠데 마치 소태 같았습니다.”


효당은 다솔사 작설차의 맛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던 것 같다. 말년에 그를 찾아온 다인들에게 어린 사미승 시절 노승에게서 들은 구전을 들려주며 회상하곤 했다. 다솔사 작설차 맛은 하동 화개 차나 구례 화엄사 차보다 나았다는데, 실제로 산지를 구별하여 차와 쇠고기를 넣고 같은 물에 끓여본 결과 화엄사 차를 넣은 쇠고기는 단단하고, 화개 차가 들어간 쇠고기는 부드러우며, 다솔사 차가 들어간 쇠고기는 흐물흐물 물러지더라는 것이다. 효당은 스스로 다솔사의 상품차를 ‘반야로’, 다음 등급을 ‘반야차’라고 이름 지어 보급했다는데 나그네는 지금 그 맛을 볼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최근에 어느 시민단체에서 효당이 친일 변절자가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는데, 동국대 김상현 교수는 이에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김 교수의 주장은 한마디로 효당의 북지황군위문사 활동이나 다솔사의 내선불교학술대회 개최는 항일 세력을 돕기 위한 협력 또는 위장이었다는 것이다. 인물에 대한 섣부른 평가는 일제 청산이라는 본질 자체를 흐리게 할 수도 있으므로 재삼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끝) 소설가/정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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