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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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땅히 한 잔의 차맛을 보면
    한 맛에 무량한 즐거움을 얻는다네
    다문화(茶文化)에 관한 자료를 살펴보면 다문화(茶文化)의 대표적인 문헌인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저술한 초의선사(草衣禪師)는 우리나라 차(茶)의 중흥조(中興祖)로서 다성(茶聖)이라 일컬어질 만큼 뛰어난 다승(茶僧)이며 학승(學僧)으로 차나무가 알려지기 이전의 시기에는 식물의 잎을 채취하여 달여 마셨거나 그 밖의 여러 가지 나뭇잎이나 열매를 따서 달여 마셨을 것으로 동다송에서 백산차(白山茶)를 언급하였고, 차(茶)가 동양적인 한 범절(凡節)로 승화(昇華)된 것은 당(唐)나라의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에서 비롯 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 차나무가 전해진 것은 흥덕왕(興德王) 3년(AD828) 12월 김대렴(金大廉)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가 차나무의 종자를 가져다 지리산(地理山- 지금은 地異山)에 심어 번성시켰다는 기록이 있으며, 신라의 화랑(花郞)들에게도 차 생활(茶生活)이 있었다는 기록 등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 이후부터 꽃피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때에는 재상(宰相)이나 장군이 서거(逝去)하면 임금은 부의(賻儀)로서 차(茶)를 하사(下賜) 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도 당시 차는 귀중하게 취급되었으며, 이조(李朝)에 와서는 차를 엽전(葉錢)처럼 한 줄에 꿰어두고 몸살이나 감기에 걸리면 달여 마셨다고 하며 이것을 청태전(靑苔錢), 또는 전다(錢茶)라고 했다.

    이렇듯 성행하던 차 생활은 당시 불교의 박해와 함께 쇠잔해 갔으나 제사나 혼례 때 차로서 예(禮)를 행하고 있는 사실로 비추어 보면 우리의 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다산(茶山) 정약용(鄭若鏞)은 [차(茶)를 마시는 민족은 흥(興)하고 차를 모르는 민족은 쇠(衰)한다] 고 까지 말했다.
    參考文獻 : 韓國 의 茶道, 藥茶의 生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