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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崔致遠)
작성일 : 2017-07-15     조회 : 563

최치원 [崔致遠, 857~?]


신라시대 학자. 879년 황소(黃巢)의 난 때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본관 경주(慶州)
별칭 자 고운(孤雲)·해운(海雲)
활동분야 문학
주요저서 《계원필경(桂苑筆耕)》《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 자 고운(孤雲)·해운(海雲). 869년(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낸 후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의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 등에 종향(從享)되었다. 글씨에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葆光塔碑)〉 〈사산비(四山碑)〉가 있고,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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