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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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李奎報,1168~1241)
작성일 : 2017-07-15     조회 : 3291

고려 중엽의 대문장가로 호를 백운산인 혹은 백운거사라 하였다.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 ‘국선생전’ 등의 저서가 있고 50여 편에 이르는 다시를 남겼다. 삼매경에서 손수 차 끓이기를 즐기어 “차 한 사발은 바로 참선의 시작” 이라고 하였고, “차의 맛은 도의 맛” 이라고 하여 세계최초이며 유일하게 다도일미(茶道一味)를 주창하였다.

다시
*이규보 깊이보기***

平生長負遲暮嗟 第一來嘗唯此耳
餉名孺茶可無謝 勸公早釀春酒旨
喫茶飮酒遺一生 來往風流從此始

평생을 불우하여 만년을 탄식했는데
일품을 감상함은 오직 이것뿐일세.
귀중한 유다 마시고 어이 사례없을손가
공에게 맛있는 봄술을 빚기 권하노니.
차들고 술 마시며 평생을 보내면서
오락가락 풍류놀이 시작해 보세.

위의 시는 운봉에 사는 노규선사가 이른 봄에 딴 차를 보고 이규보가 ‘孺茶’라 이름 붙이고 스님에게 지어준 것이다. 孺茶란 아주 어린 싹으로 이른 봄 잔설이 남아 있을 때 채취한 것이며, 귀중한 ‘孺茶’라 하였으니 얻기 어려운 차였음을 알 수 있다. 왕실에 진상했던 孺茶는 그 향기며 색, 맛이 일품이었으며 그 차를 선물받고 감사의 뜻을 전하는 시이다. 차를 마시고 술을 들면서 풍류를 즐겼던 고아한 운치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이규보는 貢茶의 병폐, 採茶의 고통스러움 등을 알 수 있는 사회적인 성격을 띤 다시들을 남겼다.
다음은 지리산 주변의 차산지 농민들의 고초를 보고 공다 농민들의 참상을 담은 시이다.

南人不會怕髬鬁 冒險衝深捫葛虆
辛勤採摘焙成團 要趁頭番獻天子

남쪽 사람들은 일찍이 맹수도 두려워 하지 않아
위험을 무릅쓰고 칡덩쿨을 헤치며 산 속 깊이 헤매이누나.
간신히 채취하여 불에 말려
남보다 앞서 임금님께 드리려 하네.

摘將萬粒成一餠 一餠千金那易致

일만 잎을 따서 떡차 한 개를 만드니
떡차 한 개 값 천금으로도 바꾸기 어렵네.

차 따는 철이 되어 맹수의 위태로움도 무릅쓰고 깊은 산 속을 헤매면서 어린 순을 따다가 차를 만드는 고통을 시로 나타낸 것이다. 일만 개의 잎을 따야 떡차 한 개를 만든다 했으니 그 괴로움이 어떠했겠는가. 그는 또 다음과 같이 쓰기도 했다.

因論花溪採茶時 官督家丁無老稚
瘴領千重眩手收 玉京萬里頳肩致
此時蒼生膏與肉 臠割萬人方得至

화계에서 차 딸 때를 말해 볼거나
관리들의 성화에 모든 집들의 늙은이 어린애가 몰려 나오네.
독기 서린 고개를 넘고 또 넘어 정신없이 차를 따고 또 따면
차를 메고 떠나는 서울길 만리 어깨가 벗겨져도 가야만 하네.
이것이야말로 백성의 기름과 살,
만 사람을 저미고 베어 얻게 되나니.

조정에서 차의 재배에는 힘쓰지 않은 채, 자생차만을 지역민을 동원하여 공납으로 거두어 들였다. 그리하여 포악한 관리들에게 몰려 깊은 산 안개 속을 헤매며 차잎을 따야하는 남녀 노소의 採茶 행렬이 줄을 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참상을 익히 알고 있는 이규보는 그 자신이 차를 즐겼던 다인이었지만 이것이야말로 백성의 기름과 살이라 표현하면서 “일천 가지를 망가뜨려 한 모금 차 마련했으니, 이 이치 생각하면 참으로 어이 없구려. 그대 뒷 날 간원에 들어 가거든 내 시의 은밀한 뜻 부디 기억하게나. 산림과 들판 불살라 차의 공납 없앤다면 남녘 백성들이 비로소 숨을 쉴 것이네”라고 친구에게 부탁을 한다.
이규보는 가난하고 힘 없는 백성들이 그 같은 비참한 형편에서도 貢茶의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진정으로 안쓰러워했다.
이 같은 공다의 폐습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말까지도 남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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